top of page

과거에 머물러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목구멍의 끝에서 겨우겨우 새어나온 말이었다. 내가 가진 용기는 모두 쥐어짜냈다. 다만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전부 다 써버렸기 때문에 그 뒤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나는 무력하게, 그러나 간절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도 나와 같은 것을 바랬으면 했다. 만약 나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관계를 가르고 있는 것인가.


 "불렀으면 말을 하던가."

 그 차가운 비수같은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심장으로 날아와 푹푹 찌르는 듯 했다. 갈수록 내가 기억하는 원래의 그의 모습이 점점 더 흐릿해졌다. 이젠 전혀 다른 사람을 놓고 착각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서로 갈망하는 것을 좇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바보같았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TV의 브라운관 속이고, 누군가가 우리가 헛바퀴를 도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참 의미없는 짓을 하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를… 내가 너를 좋아하잖아. 내가 널 필요로 하잖아. 그걸로는 부족한 거야? 그게 널 채워줄 수 없는거야?"

 "난 네가 필요 없으니까. 네 사랑도 필요 없어."


 그가 그런 말을 할 거란 것을 너무 당연하게도 알고있었다. 그게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내뱉고 있다는 것도 알고있다. 테어는 이제 다른 사람이었다. 속에서부터 곪을대로 곪아 곧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형태를 잃어버린 사람. 애써 기억을 주워담아 원형으로 되돌려놓으려고 해도 손길이 닿을 수록 더 뭉개질 뿐이었다. 그는 나를 끌어안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 사실 전부 알고있어. 테어가 나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리 없다는 걸. 애써 부정하고 미련을 두는 것은 나 혼자였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면 안돼?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어. 없어, 그런 가치. 그러니까 좋아하지 마."

 "좋아하니까 가치가 있는 거야."

 "없다니까."

 포기하면 편할 것을, 다른 것을 찾으면 좋을 것을 질질 끌고있는 내가 한심했다. 그의 손에 닿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속으로는 몇 만 번이나 손을 잡고 나의 진심을 전달했지만 현실은 의미 없이 서로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 내 두 손 뿐이었다.

 테어는 내가 눈을 뜨고 처음 만난 감정이었다. 그 때는 나도 그도 구체화 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는 이유모를 허무함과 불안함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했다. 분명 그것으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함께한다면 두려운게 없을 테였다. 그런데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싫어했다. 혐오하고, 원망했다. 자신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남이 주는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테어는 구체화 직후 돌연 사라져버렸고, 그가 떠난 뒤 내 마음 속 불안감은 급속도로 커져갔다. 나도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내 정체성을 깨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외로움의 감정.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테어에게 느꼈던 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 무슨 관계든 지속될 수록 스트레스만 늘어났다.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아닌 것 같다든가, 다른 사람의 관계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든가. 누구와 말을 섞더라도 그 때의 안정감은 커녕 되려 외로움만 질식할 정도로 들어찼다.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내 곁을 떠나면 금새 해저로 가라앉았다.


 그 때문에 나는 꼴 사나운 모습을 보이더라도 '과거'로 남겨진 것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외롭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매일 자신을 해치는 테어처럼말이다.


 "테어, 너무 극단적으로만 생각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것만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네가 어째도 희망을 붙잡고 있는게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해. 나 같으면 벌써 포기하고 어떻게 죽을까 하는 생각만 할 걸."

 "그래, 그런 거 말이야… 실낱같더라도 희망을 붙잡는 걸로 뭔가 바뀐다면."

 "넌 리스키보다 멍청해. 아니, 이 세상 모든 것들 중에서 네가 제일 멍청할 거야. 모르겠어? 네가 구체화 된 순간부터 네 감정은 족쇄야. 무슨 짓을 해도 부술 수 없고, 발악하면 되려 죄어들어. 언제까지 외면하고 못 본 척 하고 있을건데? 너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어. 설령 내가 다시 네 친구인지 뭔지가 되어준다고 해도 넌 계속 외로워서 고통받을거라고. 이해했으면 지금 빨리 자살하러 가는 게 좋을텐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축축해지는 것이 기분 나빴다. 나는 테어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것은 바뀌게 되어있다. 한 번 겪어봤기 때문에 영원이란 것은 없다는 것을 안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행복한 것은 신기루같은 추억으로 남아있고 괴로운 것만 무한히 나를 맴도는 것인가. 내가 거지같은 시나리오의 B급 영화의 등장인물이 아니고서야 그럴리가 없다.


 "그나마 내가 너한테만 친절하게 대해주는 건 알지? 그 동안의 정을 봐서 네가 아무리 귀찮게 굴어도 손 끝 하나 안 건드린건데, 이제 별로 상관없어. 우리 사이에 다음이 없길 바래."

 "……."

 차라리 모든게 짜여진 각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놀아나는 것이라도 모든게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 이렇게 고통받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세계는 뭔가 잘못됐다. 누구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세계. 창조주라는 게 있다면 분명 남이 고통받는 걸 보고싶어하는 사이코패스가 틀림없다.


 다시 한 번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이제 더 이상 용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몇 번이고 봤을 뒷모습이 흐려졌다. 분명 지금까지 흘린 눈물을 전부 모은다면 바다를 만들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그 바다에 가라앉아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하고 이끼로 뒤덮여가겠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무도 없는 심해에서, 질식사할 것만 같은 숨막힘만 영원히 느끼겠지.

BGM: 클로저스 - (구) 구로역 늑대개ver.

© 2015 - 2024. by 마솔티(@hg1635) all rights reserved.

bottom of page